'치킨게임'이 반도체 업계 용어가 된 진짜 이유

저는 경제 뉴스에 '치킨게임'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그냥 관용구려니 하고 넘겨버리는 편이었습니다. 서로 양보 안 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 뭐 그런 뜻이겠거니 하고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말은 대형마트 가격전쟁에도 쓰이고, 국제유가 전쟁에도 쓰이고, 심지어 미중 무역분쟁에도 쓰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반도체 치킨게임'이라는 조합만 고유명사처럼 굳어버렸을까요.

찾아보니 이유가 꽤 명확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고 나니, '치킨게임'이라는 말 자체의 유래부터 제가 알던 것과 조금 달랐습니다.


다들 아는 유래, 사실은 절반만 맞습니다

'치킨게임' 하면 대부분 제임스 딘이 나오는 1955년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을 떠올리실 겁니다. 두 청년이 절벽을 향해 차를 몰고, 먼저 뛰어내리는 쪽이 '치킨(겁쟁이)'이 되는 그 장면이요.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게임이론에서 '정본'으로 통하는 버전은 이 영화가 아닙니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1959년 저서 『상식과 핵전쟁』에서 정리한 버전입니다. 러셀이 묘사한 치킨게임은 절벽이 아니라 — 두 대의 차가 도로 한가운데 흰 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구조입니다. 영화와는 방향 자체가 다릅니다.

더 재밌는 건, 러셀이 이 글을 쓸 당시 실제로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봤다면 굳이 다른 버전을 새로 묘사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요. 이후 핵전략 학자 허먼 칸이 1960년 저서에서 러셀을 치킨게임 비유의 출처로 명시하면서, 영화보다 러셀의 '정면 충돌' 버전이 학술적으로 더 널리 인용되는 정본 자리를 굳혔습니다.

영화 속 통설 <이유 없는 반항>(1955) 절벽을 향해 질주하다 먼저 뛰어내리면 패배 ↓ 게임이론의 정본 러셀, 1959년 저서 정면으로 서로 돌진 핸들 먼저 꺾으면 패배
대중이 아는 영화 속 유래와, 게임이론에서 정본으로 통하는 러셀의 1959년 버전은 서로 다릅니다

러셀이 이 비유를 꺼낸 이유도 따로 있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군비경쟁, 특히 당시 미 국무장관이 말한 '벼랑 끝 전술'을 비꼬기 위해서였습니다. 둘 다 "치킨!"이라는 조롱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결국 함께 파국을 맞는다는 경고였죠. 참고로 '겁쟁이'를 뜻하는 치킨이라는 단어 자체는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됐지만, 이걸 하나의 사회적 딜레마 이름으로 굳힌 건 러셀이 처음이라는 게 학계의 정리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반도체 업계일까요?

이제 진짜 궁금했던 지점입니다. 대형마트도, 유가전쟁도 다 '치킨게임'이라 부르는데, 왜 반도체 D램 산업만 이 단어의 대표 사례처럼 통용될까요.

이유를 정리해보니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D램은 한 번 증설한 생산라인을 쉽게 멈출 수 없는 장치산업입니다. 고정비 비중이 워낙 커서, 가격이 원가 아래로 떨어져도 당장 공장을 세우면 손실이 오히려 더 커집니다. "계속 돌진할 것인가, 핸들을 꺾을 것인가"라는 치킨게임의 이분법이 다른 산업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재현되는 구조인 셈입니다.

둘째, 실제로 이 이분법 앞에서 '증산'을 택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가격이 폭락하면 보통은 생산을 줄이는 게 상식인데, 당시 D램 1위였던 삼성전자는 반대로 생산량을 더 늘렸습니다. 압도적인 미세공정 기술력과 현금 보유량을 무기로 버티기에 들어간 겁니다.

셋째 — 이게 가장 결정적입니다 — 실제로 기업이 죽었습니다. 대형마트 가격전쟁에서는 어느 쪽도 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D램 업계에서는 세계 4~5위권 기업이 실제로 두 차례나 파산했습니다. '누군가는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라는 치킨게임 본연의 극단성이 말 그대로 현실이 된 겁니다.

즉 '반도체 치킨게임'이 굳어진 진짜 이유는 단순히 경쟁이 치열해서가 아니라, D램 산업의 구조 자체가 게임이론의 정의와 이례적으로 정확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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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만에서 불이 붙었습니다

1차 치킨게임의 시작은 한국이 아니라 대만이었습니다. 대만 D램 업체들(난야, 파워칩, 프로모스 등)이 대만 정부의 자금 지원을 등에 업고 생산라인을 대대적으로 증설한 게 발단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신규 운영체제 '윈도우 비스타'가 고사양 PC 메모리 수요를 폭증시킬 거라는 기대도 증산의 명분이 됐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가격은 폭락했습니다. 여기서 삼성전자가 감산 대신 증산으로 정면 대응했고,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도 강도 높은 원가 절감으로 버티기에 들어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며 PC 수요 자체가 곤두박질쳤습니다. 모든 업체가 적자를 냈지만, 원가 경쟁력이 낮았던 대만·유럽 업체의 타격이 훨씬 컸습니다. 2007년 1분기 대비 2008년 3분기 시장점유율을 보면, 삼성전자는 25.7%에서 30.2%로 오히려 늘었고, 반대로 4위였던 독일 키몬다는 13.2%에서 9.8%로 주저앉았습니다.

D램 시장점유율 변화 (2007년 1분기 → 2008년 3분기) 삼성전자 2007년 1분기 25.7% 2008년 3분기 30.2% ↑ 하이닉스 2007년 1분기 22.4% 2008년 3분기 19.3% 엘피다 2007년 1분기 12.0% 2008년 3분기 15.8% 마이크론 2007년 1분기 9.0% 2008년 3분기 10.3% 키몬다 13.2% → 9.8% (2009년 파산)
2007년 1분기 대비 2008년 3분기, 삼성전자만 점유율이 늘고 키몬다는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자료: 아이서플라이, 한국경제)

결국 세계 4위 D램 업체였던 독일 키몬다가 2009년 2월, 뮌헨 파산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습니다. 당시 주력 제품이던 512메가바이트 DDR2 D램 가격은 0.5달러 수준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 키몬다의 뒤를 이어 무너질 뻔했던 일본 엘피다는 일본 정부가 300억 엔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은행 채권단이 1,000억 엔을 추가 융자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2010년, 끝난 줄 알았던 전쟁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키몬다가 사라지자 공급이 줄면서 2010년 D램 가격이 잠시 회복됐습니다. 업계 전체가 흑자로 돌아섰죠. 그런데 여기서 살아남은 엘피다가 다시 움직였습니다. 대만 업체들과 손잡고 재차 증산에 나선 겁니다. 2차 치킨게임의 시작이었습니다.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주력 제품이던 1기가비트 DDR3 D램 가격이 2010년 10월 1달러 아래로 추락했고, 엔화 강세까지 겹치며 엘피다는 5분기 연속 적자에 시달렸습니다. 파산 직전 분기 영업이익률은 마이너스 73%까지 떨어졌다고 하니, 얼마나 극단적인 출혈경쟁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2012년 2월 말, 세계 3위 메모리 업체였던 엘피다는 결국 파산을 신청했습니다. 이번엔 일본 정부도 손을 놓았습니다. 엘피다는 미국 마이크론에 인수됐고, 1995년 20여 개에 달했던 D램 업체는 이렇게 두 차례의 치킨게임을 거쳐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빅3' 체제로 정리됐습니다.

1 2007년 — 대만발 증산 대만 업체들 생산라인 확대 2 2008년 — 금융위기 겹침 PC 수요 급감, 전업체 적자 3 2009년 — 키몬다 파산 세계 4위 D램 업체 퇴장 4 2010년 — 잠깐의 회복 엘피다·대만 재차 증산 5 2012년 — 엘피다 파산 마이크론에 인수, 빅3 재편
1차·2차 D램 치킨게임 타임라인 — 2007년 대만발 증산에서 2012년 엘피다 파산까지

지금은 낸드플래시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빅3 체제가 자리 잡은 뒤 D램 업계는 한동안 '슈퍼사이클(초호황)'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치킨게임이라는 말 자체는 반도체 업계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2022년에는 삼성전자가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감산 없이 생산을 이어가는 전략을 두고, 업계에서 다시 '치킨게임'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D램에서 두 차례 치킨게임을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는 만큼, 낸드플래시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렸던 거죠. 다만 낸드플래시는 D램보다 참여 업체가 많아(중국 YMTC 등 포함) 산업 재편이 더 어려울 거라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SK하이닉스는 오히려 이듬해 설비투자 규모를 줄이기로 하는 등, '빅3' 안에서도 전략이 엇갈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도체 업계에서 '치킨게임'이라는 말이 완전히 과거형이 되기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치킨게임'이라는 말 자체는 냉전 시대 철학자의 서재에서 나왔지만, 정작 이 말이 가장 뼈아프게 실현된 곳은 반도체 공장이었습니다.

D램 산업이 유독 이 이름값을 톡톡히 치른 이유는 결국 하나로 모입니다. 멈추기 어려운 생산라인, 그 앞에서 '증산'을 택한 결단, 그리고 실제로 기업이 사라진 결말까지 — 게임이론의 정의를 이렇게 문자 그대로 재현한 산업도 드물었으니까요.

다음 편에서는 D램 업계가 즐겨 쓰는 또 다른 표현, '슈퍼사이클'이 정말 정해진 순환 주기인지 아니면 승자의 자기 암시에 가까운지를 다뤄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1. 반도체 치킨게임의 추억, 최후의 승자는? – SK하이닉스 뉴스룸 — 기업 공식 뉴스룸, 2017-09-05
  2. 반도체 '치킨게임' 삼성전자 웃고 하이닉스 울고 – 한국경제 — 경제지 보도, 2008-11-18
  3. [반도체 치킨게임] 치킨게임의 추억, 삼성전자 또 웃을 수 있을까 – 대한경제 — 경제지 보도, 2022-11
  4. 치킨게임 – 기획재정부 시사경제용어사전 — 정부 공식 용어사전
  5. On Minoritarian Chicken and Majoritarian Bullying – Springer Nature Link — 학술 단행본 챕터
  6. Global games of chicken are frying the planet – Boston Globe — 정론지 칼럼, 2019-08-27
  7. [이슈분석] 되살아난 반도체 '치킨게임'의 추억 – 오피니언뉴스 — 경제 전문지, 202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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