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알고 보면 우리말 속에 있다 · 7편
저는 '판도라의 상자'라는 말을 들으면 늘 뚜껑 달린 나무 상자를 떠올렸어요. 그런데 원전을 찾아보니, 판도라가 열었다는 건 상자가 아니라 커다란 항아리였습니다. 심지어 이 오역이 벌어진 게 신화가 만들어진 지 무려 2천 년도 더 지난 뒤의 일이라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오늘은 판도라 이야기의 원래 모습과, 이 이야기가 어쩌다 '상자'라는 이름을 얻게 됐는지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
판도라는 왜 만들어졌을까요 🔥
판도라 이야기가 처음 기록된 문헌은 기원전 700년경 시인 헤시오도스가 쓴 《일과 날》입니다. 신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것에 분노한 제우스의 명령으로, 인류를 벌하기 위한 존재로 첫 여성 판도라를 함께 빚어냈습니다.[1]
판도라는 결혼 선물로 봉인된 커다란 항아리 하나를 받는데, 그 안에는 애초에 신들이 그녀에게 나눠준 재능들이 아니라, 아직 열리지 않은 재앙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이 항아리를 절대 열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1]
판도라는 제우스의 '선물'이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빼앗긴 것에 대한 '벌'로 만들어진 존재예요. 신들은 저마다 판도라에게 재능을 하나씩 선물했는데, 그래서 이름도 '모든(pan) 선물(dora)'을 뜻합니다.
항아리를 연 순간,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가 뚜껑을 여는 순간, 그 안에 갇혀 있던 질병과 슬픔, 가난, 전쟁 같은 온갖 재앙이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놀란 판도라가 서둘러 뚜껑을 다시 닫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2]
그런데 항아리 안에는 딱 하나, '희망'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신화는 이중적으로 읽힙니다. 재앙을 부른 이야기인 동시에, 아무리 나쁜 상황에도 마지막 희망은 남아 있다는 이야기로요.
원전 vs 우리가 아는 이야기
| 구분 | 원전 (헤시오도스) | 지금 통용되는 이야기 |
|---|---|---|
| 그릇의 종류 | 피토스(대형 항아리) | 상자(box) |
| 판도라의 성격 | 제우스가 내린 벌의 도구 | 순수한 호기심의 상징 |
| 남은 것 | 엘피스(희망 또는 기대) | 희망 |
그런데 왜 '상자'로 알려졌을까요 📦
이 오역의 주인공은 16세기 인문학자 에라스뮈스입니다. 1508년, 그가 헤시오도스의 그리스어 원전 속 '피토스(항아리)'라는 단어를 라틴어 격언집 《아다지아》에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작은 상자를 뜻하는 라틴어 '픽시스'로 잘못 옮겼습니다.[3]
이후 르네상스 시대 유럽 지식인들이 에라스뮈스의 라틴어 판본을 교과서처럼 참고하면서, '항아리'가 아닌 '상자' 이미지가 문학과 회화 속에 굳어졌습니다. 19세기 화가 단테이 가브리엘 로세티가 그림 속에서 판도라를 상자와 함께 그려 넣은 것도 이런 흐름을 더 굳혔습니다.[3]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판도라의 항아리'가 맞는 표현이에요. 다만 워낙 오랫동안 '상자'로 굳어져 왔기 때문에, 지금은 두 표현 모두 같은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로 통용됩니다.
📝 오역이 벌어진 순서
1) 기원전 700년경, 헤시오도스가 그리스어로 '피토스(항아리)'라고 기록
2) 1508년, 에라스뮈스가 라틴어 '픽시스(상자)'로 오역
→ 이후 회화·문학 작품 속에서 '상자' 이미지가 굳어짐
지금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쓰고 있을까요 💬
오늘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표현은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지만, 일단 건드리면 걷잡을 수 없는 문제나 파장을 불러오는 사건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이 표현은 1579년 영국의 저술가 스티븐 고슨이 자신의 글에서 신화 속 재앙 이미지를 빗대어 쓰면서 영어권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4]
"괜히 그 얘기 꺼냈다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꼴이 됐다"처럼, 되돌릴 수 없는 파장을 스스로 불러왔을 때 자주 쓰는 표현이에요.
핵심 요약 🗒️
오늘 다룬 판도라 이야기, 핵심만 정리해볼게요.
- 기원: 기원전 700년경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이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 진실: 원전에서는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피토스)'였습니다.
- 오역: 1508년 에라스뮈스의 라틴어 번역 과정에서 '상자'로 바뀌었습니다.
- 지금 쓰임: 건드리면 되돌릴 수 없는 큰 파장을 부르는 사건을 뜻하는 관용구로 쓰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
항아리가 상자로 둔갑한 역사까지 알고 나니,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들이 얼마나 여러 겹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새삼 느껴지네요. 다음 편에서는 '아킬레스건'이라는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자료
[1] History Cooperative, "Pandora's Box: The Myth Behind the Popular Idiom"
[2] New World Encyclopedia, "Pandora's Box"
[3] The Vintage News, "'Pandora's Box' was actually 'Pandora's Jar'"
[4] Grokipedia, "Pandora's box" (영어권 관용구 사용사 정리)
the-story-why.blogspot.com 아킬레스건 어원이 된 그리스 신화 아킬레우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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